나의 가족史

할아버지와 할머니

하늘 나라 1 2006. 3. 30. 07:46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네요.

11세 된 소년과 13세 된 소녀가 살았었는데,

본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님들의 뜻에 의해 혼인을 했었답니다.

요즘 젊은이들 같이 설레임도 없었을테고, 불안하기만 했었겠지요.

그래도 혼인을 해서 부부가 되었으니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면

더 없이 좋았을테지만,

얄궂은 운명이란 게 두 사람의 행복을 시기해서인지는 몰라도 혼인을 하자마자

새 신랑인 11세의 소년은 이름 모를 병이 들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13세 되던 해에 유명을 달리 했답니다.

그 때에 신부는 15세가 되었지요.

요즘 같으면 새 삶을 찾는 게 아무 죄나 문제도 없이 행복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 시절에는 행복을 찾아가는 새 삶이 용납이 되지 않았었지요.

그래서 15세 된 신부는 하얀 소복을 입고 흰 가마를 타고 시댁에 와

72세에나 끝이 나는 고행을 시작 했답니다.

자손을 본다는 기약도 없이 시부모님을 봉양하면서 몇 년을 사시다가

시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완전한 혼자가 되시어 25~6년을 사시는데,

마침 그 집안에 6촌간인 친척집에서 아들이 하나 태어났답니다.

운명이란 게 이런 건지,

아기가 태어난 집에서는

아들을 출산하신 아기 어머니께서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어린 핏덩이를 놔두고

세상을 뜨셨다는군요.

그러니 아기 아버지께서는 어린 핏덩이를 안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이면서 키웠다니, 그 분의 심정이 오죽했을까요.

아마 그 때에도 요즘 같은 해외 입양 같은 게 있었다면 해외 입양도 생각했었겠지요.

그런 게 없었으니 문중 어른들의 합의하에

혼자 사시는 재종숙모에게 입양시키기로 결정을 했답니다.

혼자 사시는 재종숙모에게는 힘들이지 않고 아들이 하나 생겼고,

어린 아기에게는 새로운 엄마가 한분 생겼으니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좋은 일이겠지요.

새 엄마의 정성으로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나서 건장한 청년이 되었지만

무서운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혼자 사시는 엄마의 사랑만 받고 자라서인지.

마을에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피우고 투전이란 못된 노름이나 배워서 가산을 탕진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답니다.

그 것을 보고사시는 어머니의 속이 오죽했을까요?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그런 아들을 심하게 나무라시지는 않으셨답니다.

조용히 타이르시기만 하시고,

그래서인지 아들이 마을에서 말썽은 피웠지만

어머님께는 아주 잘 하는 효자소리를 듣기도 했답니다.

타고난 심성은 착했었겠지요.

그 아들도 자라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고도 노름버릇은 고치지를 못하고

계속 하다가 그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 아들의 아들이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서당에 보내서

천자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배운 것을 잘 하지 못하면 목침위에 세워놓고

종아리도 때렸답니다.

그러다보니 어머님께서는 연로하셔서 돌아가셨지요.

얼마나 손자를 귀여워하셨는지 임종을 앞두고 어른들이 머리맡에 앉아있을 때도

그 손자는 젖을 만지겠다고 할머니 품을 파고들었답니다. 울면서~~

그 손자를 어른들이 억지로 떼어낸 후에 운명을 달리 하셨다는 군요.

그 아들의 아들이 8살이 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답니다.

그 때로써는 향년 72세로 장수하신 편이었지요.

열다섯 살에 소복입고 흰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셔서 57년간을 수절하시다가

힘들었던 삶을 마감하셨지요.

그 후로도 5~6년간 그 아들은 노름을 계속하다가 그 아들이 초등학교에서

시골이지만 공부를 좀 한다고 하니 상급학교에 보내고 싶으셨는지,

한 동안 계속하던 노름을 끊고

일제 말에 일본 구주 탄광에 징용을 가서 탄광생활을 해서인지

강원도 탄광으로 돈을 번다고 새벽에 륙색(리꾸샤꾸)을 꾸리면서

자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금의 태백시인 강원도 삼척군 상장면 소도리에 있는

함태광업소에서 광부생활을 시작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교육시켰답니다.

그 것도 천리 먼 타향에 하숙을 시켜서,

부모님 속을 썩히는 게 집안 내력인지 그 아들도 혼자서 하숙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싸돌아다니면서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고

요즘 얘기들을 하는 향토 장학금이 오면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려 대포집이나 극장을

드나들기만 하고 어린아이가 담배나 피우면서 공부는 뒷전이었답니다.

그러던 그 손자가 자라서 환갑이 되어서야 철이 드는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원하시던 일을 이제야 해 드렸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일이란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고 후회를 하셨는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한 곳에 모시고 싶어 하셨는데,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혼인을 하시고 110여년이 지나서 합방을 하신 것이랍니다.

신방을 꾸며드린 게 엊그제 병술 년 3월 26일이니. 벌써 이틀이 지났군요.

아마도 지금쯤은 저 하늘에서 꿀맛 같은 신혼을 보내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 날이 우리 강산회 삼악산 등반일 이었지요.

그래서 삼악산 등산도 참여를 하지 못했답니다.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자가 지금의 “나“이니까,

하 하 하

횡설수설 해 보았네요.

우리 강사모 모든 회원님들!

주자 십회훈에도 제일 앞에 있는 “부모불효사후회(父母不孝死後悔)”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님이 살아생전에 잘 해드리세요.

항상 건강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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